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이 미치유키 (문단 편집) == 생애 == 구루시마 성주(来島城主)였던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장남. 다른 이름으로는 미치토시(通年), 미치유키(通之), 미치히사(通久) 등으로도 불린다. 도쿠이 씨에 입적하여 이를 계승하였으므로, 아버지 무라카미 미치야스가 1567년에 사망한 후에도 가독을 상속받지는 못했다. 가독을 승계한 것은 사남 [[구루시마 미치후사|무라카미 미치후사]]이다. 1582년에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무라카미 미치후사]][* 이 무렵 미치후사는 성명(城名)인 구루시마(来島) 씨로 바꾼다.]와 함께 오다 군에 항복했다가 [[무라카미 타케요시]] 등 고노 가문에 남아있던 무라카미 수군에 공격을 받았고 무라카미 수군을 돕는 모리 가문에게도 공격을 받았으며, 1584년 2월에 모리 가문이 이요 국으로 출병해 3월 17일에 모리 가문 측의 장수인 시시도 모토타카가 에라 성을 공격하자 미치토시는 에라 성, 카시마 성에서 저항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선봉이 되어 에라 성을 중심으로 한 3천여 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1587년의 큐슈 정벌,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에 출정했다. [[당포 해전]]에서 수군의 지휘관으로 첨전했는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먼저 거북선으로 근접해서 미치유키가 탄 왜장선을 격파하는 도중에 미치유키는 저항하다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이때를 노린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병사들을 이끌고 적선에 올라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도쿠이 미치유키는 이때 전사했다. 사후 김완과 진무성이 그의 목을 베었다. 일본군 장수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일본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배를 버리며 육지로 도망쳤다. 전투 직후 조선군이 그의 배를 수색할때 구루지마의 [[부채]]를 습득했다고 한다. 이 부채는 보통 부채가 아니라 도요토미가 친필 서명까지 새겨서 그에게 하사한 황금 부채로, 이순신이 선조에게 전리품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부채는 함께 참전했던 [[가메이 고레노리]]의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있는데, 이 편지를 주고 받은 시기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영지는 본가인 [[구루시마 미치후사]]에 더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